내러티브 디자인
이야기와 플레이를 맞물리게 하는 방법이다. 환경 서사, 분기, 플레이가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다.
목차 (8)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규칙과 이야기가 다른 말을 할 때
게임은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한다. 이야기(컷신, 대사, 설정)로 말하고, 규칙(무엇이 보상받고 무엇이 벌받는지)으로도 말한다. 둘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상태를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라고 부른다. 이 말은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이 2007년 블로그 글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보관본)에서 바이오쇼크를 비평하며 만들었다.
호킹의 분석은 이렇다. 바이오쇼크의 이야기는 이기심을 미덕으로 보는 사상을 비판한다. 그런데 규칙은 처음에 "힘을 좇으면 나아간다"는 계약을 내밀고, 리틀 시스터를 수확해 자원을 더 얻는 선택으로 그 이기심을 직접 느끼게 한다. 여기까지는 규칙이 주제를 잘 전한다. 문제는 이야기 쪽 계약이다. 이야기는 플레이어에게 다른 인물을 돕는 길만 남겨 두고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규칙은 "너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는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해, 결국 어느 쪽에도 몰입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더 흔한 예는 컷신에서는 사람 하나 죽이기를 망설이는 주인공이 플레이 중에는 수백 명을 쓰러뜨리는 경우다. 부조화를 모두 없앨 필요는 없다. 게임은 관습을 깔고 가고 플레이어도 그것을 안다. 다만 이야기가 무겁게 다루는 주제일수록, 규칙이 같은 주제를 가볍게 다루면 그 간극이 크게 들린다. 반대로 규칙과 이야기가 같은 말을 하면 플레이 자체가 주제를 전하는 가장 강한 수단이 된다.
환경 서사: 공간이 사연을 말한다
환경 서사(environmental storytelling)는 장소에 놓인 물건과 흔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이다. 뒤집힌 의자, 문에 박힌 손톱 자국, 벽에 적힌 경고문만으로 플레이어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스스로 맞춘다. 맞추는 일을 플레이어가 하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대사로 듣는 것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 디즈니 이매지니어 출신 돈 카슨(Don Carson)은 2000년 Gamasutra 글 Environmental Storytelling에서 테마파크가 손님이 걷는 공간 자체에 이야기를 심는 방법을 게임 세계에 옮겨 설명했다.
-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글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에서 게임 공간이 이야기를 품는 방식을 이미 아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플레이어가 이야기를 연기하는 공간, 정보를 심어 둔 공간, 이야기가 저절로 생기는 공간으로 나눴다.
- 하비 스미스(Harvey Smith)와 마티아스 보르히(Matthias Worch)의 GDC 2010 강연 What Happened Here? Environmental Storytelling은 소품 배치, 빛, 장면 구성 같은 기본 도구에 더해, 게임 시스템이 남긴 흔적(전투의 결과, 반응하는 환경)으로도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슬라이드는 스미스의 블로그 글에 올라 있다.
실무 요령은 몇 가지로 모인다. 장면은 한 번에 한 가지 사연을 말하게 하고, 단서는 크리티컬 패스 근처에 두되 놓쳐도 진행에 지장이 없게 한다. 인과를 읽을 수 있게 배치한다. 피 묻은 발자국이 문으로 이어지면 "누군가 다쳐서 저 문으로 갔다"가 읽힌다. 공간 짜는 법 자체는 레벨 디자인 노트에서 다룬다.
플레이로 보여 주기
영화의 "말하지 말고 보여 줘라"(show, don't tell)는 게임에서 한 걸음 더 간다. "하게 하라"다. 인물이 지쳤다는 것을 대사로 말하는 대신 캐릭터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고, 관계가 깊어졌다는 것을 컷신 대신 함께 해야만 풀리는 퍼즐로 보여 준다.
- 조작이 감정이 된다: 브라더스: 두 아들의 이야기는 두 형제를 컨트롤러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 조종하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 조작 방식 자체가 상실과 성장을 전하는 장치가 된다.
- 규칙이 주제가 된다: 페이퍼스, 플리즈는 입국 심사의 규칙을 점점 늘려, 플레이어가 서류를 빨리 처리하려 할수록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경험을 만든다.
- 반복이 의미가 된다: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게 하다가 맥락만 바꾸면, 행동은 같아도 무게가 달라진다.
이런 방법은 시스템과 이야기가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의 반대편 해답이다.
분기 구조: 선택형 이야기의 뼈대
선택지가 있는 이야기는 분기가 늘수록 써야 할 분량이 기하급수로 는다. 그래서 작가들은 몇 가지 뼈대를 골라 쓴다. 샘 카보 애슈웰(Sam Kabo Ashwell)의 2015년 글 Standard Patterns in Choice-Based Games는 이 뼈대에 이름을 붙여 분류했고, 지금도 선택형 서사 설계의 공용어처럼 쓰인다.
| 패턴 | 모양 | 강점과 약점 |
|---|---|---|
| 시간 동굴(Time Cave) | 계속 갈라지고 거의 다시 모이지 않는다 | 선택이 크게 느껴지지만, 한 번에 보는 분량이 작다 |
| 건틀릿(Gauntlet) | 한 줄기에 실패나 금방 돌아오는 곁가지 | 쓰기 쉽고 대부분을 보지만 갇힌 느낌을 준다 |
| 가지와 병목(Branch and Bottleneck) | 갈라졌다가 정해진 사건에서 다시 모인다 | 상태 변수로 앞의 선택을 기억해야 의미가 산다 |
| 퀘스트(Quest) | 지역 단위 덩어리를 오가며 몇 안 되는 결말로 간다 | 여행과 탐험에 맞지만 분량이 크다 |
| 열린 지도(Open Map) | 장소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 세계를 탐험하는 맛이 있지만 이야기가 느리게 흐른다 |
| 분류 모자(Sorting Hat) | 초반 선택으로 몇 갈래 큰 줄기 중 하나에 들어간다 | 선택이 무겁지만 사실상 여러 편을 쓰게 된다 |
| 떠다니는 모듈(Floating Modules) | 중심 줄기 없이 상태나 운에 따라 장면이 열린다 | 스탯 중심 세계에 맞지만 잘 쓰기 어렵다 |
| 고리와 성장(Loop and Grow) | 같은 줄기를 되풀이하며 상태에 따라 새 선택이 열린다 | 반복되는 하루나 갇힌 공간 이야기에 잘 맞는다 |
상업 게임은 대개 가지와 병목을 바탕에 둔다. 큰 줄거리는 모이게 하고, 앞의 선택은 변수로 기억해 대사, 인물의 태도, 작은 장면으로 돌려준다. 플레이어가 선택의 결과를 볼 수만 있다면 줄거리가 같은 곳으로 모여도 선택이 헛되다고 느끼지 않는다.
가지 너머: 스토리렛과 품질 기반 서사
분기 나무 대신 이야기를 작은 조각으로 쪼개고, 조건이 맞는 조각을 꺼내 보여 주는 방법도 있다. 에밀리 쇼트(Emily Short)는 2016년 글 Beyond Branching에서 이런 구조를 정리했다.
- 품질 기반 서사(quality-based narrative): 플레이어의 수치("의심 3", "명성 5")가 조건이 되어 어떤 이야기 조각(스토리렛, storylet)이 열릴지 정한다. Fallen London 같은 게임이 대표적이다.
- 현저성 기반(salience-based): 지금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조각을 고른다. 아래의 바크 시스템이 같은 원리다.
- 장점: 조각을 나중에 더하기 쉽고, 분기 나무처럼 분량이 폭발하지 않는다. 대신 전체 줄거리의 흐름은 작가가 직접 쥐기 어렵다.
도구도 이런 구조를 받쳐 준다. 인클(inkle)이 만든 공개 스크립트 언어 ink는 "코드가 아니라 마크업"을 내세워, 작가가 글을 먼저 쓰고 그 사이에 선택지와 조건, 상태 변수를 끼워 넣게 한다. 인클은 자사 게임 모두를 이 언어로 썼다고 밝히고 있고, 소스와 Unity 연동이 공개되어 있다. 작가가 프로그래머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고치고 돌려 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크와 시스템 대사: 상황에 맞는 한마디 고르기
경비병이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고 중얼거리고, 동료가 "탄약 떨어졌어!"를 외치는 짧은 대사를 바크(bark)라 한다. 바크는 이야기이자 정보다. 잠입 게임에서는 적의 속마음을 알려 주는 핵심 장치이고, 협동 게임에서는 동료의 상태를 전한다.
밸브의 일란 러스킨(Elan Ruskin)은 GDC 2012 발표 AI-driven Dynamic Dialog through Fuzzy Pattern Matching(슬라이드와 발표 원고)에서 Left 4 Dead 등 밸브 게임의 대사 시스템을 공개했다. 구조는 단순하다.
- 세계의 상태를 "누가 말하나", "어디인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같은 사실(fact)의 키-값 목록으로 모은다.
- 대사마다 그것이 나올 조건 목록(규칙)을 붙여 데이터베이스에 넣는다.
-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의 사실로 규칙을 찾는다. 조건이 모두 맞는 규칙 중 조건이 가장 많은, 즉 가장 구체적인 규칙의 대사를 고른다.
- 대사가 나오면 "이 얘기를 이미 했다" 같은 사실을 다시 써 넣어,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고 앞의 대사에 이어지는 대답을 고를 수 있게 한다.
가장 구체적인 것을 고르는 규칙 덕분에 작가는 일반적인 대사("적이다!")를 먼저 깔고, 특별한 상황("이 인물이 이 장소에서 처음 보는 적")의 대사를 나중에 더하기만 하면 된다. if-else 덩어리를 고치지 않고 표에 행을 더하는 방식이라 작가가 직접 대사를 늘릴 수 있다. AI 쪽의 판단 구조는 게임 AI·길찾기 노트가 다룬다.
이머전트 내러티브: 시스템이 만든 이야기
작가가 쓰지 않았는데 플레이어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가 있다. 시스템끼리 부딪쳐 생긴 사건을 플레이어가 이야기로 엮는 것을 이머전트 내러티브(emergent narrative)라 한다.
- 드워프 포트리스는 드워프마다 성격, 관계, 기억을 시뮬레이션한다. 요새가 무너지는 과정이 플레이어 사이에서 긴 연대기로 쓰여 퍼질 만큼, 이야기가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게임의 상징이 됐다.
- 림월드의 타이난 실베스터(Tynan Sylvester)는 GDC 2017 강연 RimWorld: Contrarian, Ridiculous, and Impossible Game Design Methods에서 림월드를 게임보다 "이야기 생성기"로 보고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건을 언제 얼마나 세게 던질지 고르는 AI 스토리텔러가 그 중심이다. 그의 설계 철학은 디자이너의 생각 노트에서 더 다룬다.
이머전트 이야기는 시스템이 정교해서만 생기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사건에 의미를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이름 붙은 인물, 관계, 기억, 그리고 사건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기록(로그, 묘비, 연대기)이 있을 때 플레이어는 우연을 이야기로 엮는다. 인물이 단순할수록 플레이어가 빈칸을 채울 여지도 커진다. 무작위 사건을 만드는 기술은 절차 생성·월드 노트에 있다.
플레이어의 주체성과 작가의 이야기
내러티브 디자인은 결국 두 힘의 줄다리기다. 작가는 정해진 이야기의 힘(복선, 반전, 감정의 정점)을 원하고, 플레이어는 자기 선택이 의미 있기를 원한다(주체성, agency).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마다 둘의 비율을 정한다.
| 쪽 | 얻는 것 | 잃는 것 | 예 |
|---|---|---|---|
| 작가의 이야기 | 정교한 구성, 연출, 감정의 정점 | 플레이어는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 선형 액션 어드벤처 |
| 선택과 분기 | 선택이 결과를 바꾸는 느낌 | 분량이 크고 한 번에 보는 비율이 낮다 | 선택형 RPG, 비주얼 노벨 |
| 시스템이 만든 이야기 | 플레이어마다 다른 고유한 이야기 | 구성과 정점을 작가가 쥐기 어렵다 | 림월드, 드워프 포트리스 |
선택의 무게는 결과의 크기보다 "인정받았다"는 느낌에서 나올 때가 많다. 줄거리가 같은 곳에 닿더라도 인물이 내 선택을 기억하고 언급하면 선택은 의미를 얻는다. 반대로 선택지를 주고 결과를 전혀 돌려주지 않으면, 선택이 없을 때보다 더 큰 실망을 남긴다. 그래서 선택지는 줄 수 있는 만큼만 주고, 준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는 원칙이 자주 쓰인다.
- Ludonarrative dissonance — Wikipedia
-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archived) — Clint Hocking
- Environmental Storytelling: Creating Immersive 3D Worlds Using Lessons Learned from the Theme Park Industry — Game Developer
- 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 — Henry Jenkins
- GDC 2010 (What Happened Here? slides) — Harvey Smith
- Standard Patterns in Choice-Based Games — Sam Kabo Ashwell
- Beyond Branching: Quality-Based, Salience-Based, and Waypoint Narrative Structures — Emily Short
- ink — inkle
- inkle/ink — GitHub
- AI-driven Dynamic Dialog through Fuzzy Pattern Matching (GDC 2012 slides) — Valve
- Dwarf Fortress — Bay 12 Games
- RimWorld — 공식 사이트
- RimWorld: Contrarian, Ridiculous, and Impossible Game Design Methods — GDC